중상주의와 중농주의

economic thoughts
Author

Cheonghyo Cho

본 블로그 시리즈는 경제학 사상사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를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전반적인 글의 구성과 초안은 ChatGPT (GPT-4.5)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으며, 세부적인 표현과 내용 구성은 블로그 필자의 판단에 따라 수정 및 보완되었습니다.

경제학 사상사 (3):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경제학 사상사를 살펴볼 때, 중세의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경제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의미의 경제학이 태동하는 시점으로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이 두 경제 사상은 16세기에서 18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근대 국가 형성과 상업적 자본주의 성장의 배경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비교하면서 각 사상의 특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심층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중상주의(Mercantilism)

중상주의는 대략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널리 퍼졌던 경제 사상이다. 이 사상은 유럽의 신흥 근대 국가들이 정치적·군사적 힘을 키우고 국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던 역사적 맥락에서 나타났다.

중상주의의 핵심 원리

중상주의는 기본적으로 국부를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의 축적량으로 규정하였다. 즉, 국가는 가능한 한 많은 금과 은을 축적해야 하며, 이를 위해 다음의 전략을 사용했다.

  • 무역수지 흑자 추구: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제한함으로써 국가가 더 많은 귀금속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바로 보호무역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규제: 중상주의 사상은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규제하여 자국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믿음에 기반했다.

  • 식민지 경제: 식민지는 본국을 위한 원자재 공급처이자 상품의 독점적 시장으로 간주되어 식민지 정책과 제국주의적 확장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대표적인 중상주의 사상가와 이론

  • 토마스 먼(Thomas Mun, 1571-1641): 『잉글랜드의 외국 무역에 의한 부의 축적』(1664)에서 무역수지 흑자를 강조했다.

  •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적극적인 보호무역과 제조업 육성을 통한 국가적 경제 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상주의의 비판과 한계

중상주의는 당대의 국가적 목표와 부합했지만, 다음과 같은 근본적 한계를 지녔다.

  • 제로섬(Zero-Sum) 사고: 중상주의는 세계의 부가 일정하다고 생각하여, 한 국가의 이익은 다른 국가의 손실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이는 국제 협력보다는 경쟁과 분쟁을 촉발하였다.

  • 국내 시장의 소홀: 국내 소비자와 농업 분야가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보호주의가 오히려 물가를 높이고 국내 소비자에게 피해를 준다는 비판이 있었다.

전고전학파 (영국 계몽주의)

17세기 영국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영국 내전(English Civil War), 찰스 1세의 처형, 크롬웰 독재정권의 등장, 런던 대화재 및 대역병 등 국가적 위기가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이 혼란기는 1688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으로 절정에 달했으며, 이후 의회 권력이 강화되고 정치적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혁신적 변혁은 지적·과학적 발전을 자극했다. 대표적으로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의 기체 법칙(1660),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프린키피아』(1687) 발간이 있으며, 이 과학적 발전은 사회과학과 경제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존 로크는 영국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그의 사상은 정치와 경제를 결합하여 개인의 재산권 보호를 강조하였다.

  • 재산권과 노동가치론: 로크는 『통치론 제2편』(1689)에서 인간의 노동과 자연환경이 결합하여 사유재산권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유명한 명제는 “각 개인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재산권을 가지며, 그 신체를 통해 노동하여 자연의 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권리를 가진다.”였다.

  • 정부의 역할: 정부는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lives, liberties and estates”)을 보호해야 하며, 개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화폐와 가격이론: 로크는 『이자율 인하 및 화폐가치 상승에 관한 몇 가지 고찰』(1691)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로크의 재산권 보호와 시장에 대한 이해는 후대 자유주의 경제 사상의 근본 원칙이 되었다.

더들리 노스(Dudley North, 1641~1691)

더들리 노스는 상인이자 경제 사상가로 중상주의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 자유무역과 시장의 자율성: 노스는 『무역론』(Discourses Upon Trade, 1691)을 통해 무역은 일방적 이익 추구가 아니라, 양측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상호 교환이라고 주장하였다. 무역 규제는 효율적인 분업과 시장의 이익을 감소시킨다고 지적하며, 자유무역과 무역의 개방성을 주장하였다.

  • 국부의 원천: 국부는 보호무역이나 무역 수지의 흑자(positive trade balance)가 아닌, 자유로운 교역과 시장의 자연스러운 분업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노스의 주장은 후대 리카도와 스미스가 제시한 비교우위론과 자유무역론의 초기 형태로 평가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

흄은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경제사상가로서, 중상주의 이론의 현실적 한계를 비판하며 경제학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다.

  • 중상주의 비판과 무역균형론: 흄은 『정치 담론』(Political Discourses, 1752)에서 국가가 무역흑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금과 은이 무역 흑자를 통해 한 국가에 유입되면 물가가 상승하여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고 결국 무역균형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설명하였다(가격-정화 메커니즘, Price-specie flow mechanism).

  • 통화수량설의 초기 형태: 흄은 화폐의 양과 물가수준 간의 관계를 분석하며 현대적 화폐수량설의 초석을 놓았다.

흄의 이론은 이후 통화정책과 무역이론의 근본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 1670~1733)

맨더빌은 네덜란드 태생의 철학자이자 경제사상가로, 인간의 사적 욕망과 악덕(vices)이 사회 번영의 근본이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 사적 이익과 사회적 진보: 맨더빌의 저서 『꿀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는 인간의 이기심과 사치가 자본의 순환과 시장 확대를 촉진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사회 발전을 위한 필수적 동력이라고 설명하였다. 미덕(virtue)은 오히려 경제적 발전을 저해할 수 있으며, 인간의 사적 욕망이 자유롭게 추구될 때 사회가 진보한다고 역설하였다.

맨더빌의 이론은 이후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 개념으로 발전시킨 인간의 이기적 행동과 시장 균형에 대한 사상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

허치슨은 애덤 스미스의 직접적인 스승으로, 윤리학과 경제학을 연결시켜 경제 행위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 경제학의 윤리적 기초: 허치슨은 경제적 행위가 인간 본성과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오이코노미아(oikonomia, 가계관리)’ 개념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하여, 경제적 활동이 윤리적 목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허치슨은 스미스가 경제학을 윤리학적 관점과 통합하여 접근할 수 있도록 영향을 미쳤다.

중농주의(Physiocracy)

중상주의의 한계에 대한 반발로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등장한 경제 사상이 중농주의이다. 중농주의자들은 경제의 진정한 근원은 농업 생산이라고 주장하며, 경제 활동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중시했다.

중농주의의 핵심 원리

중농주의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연적 질서(Ordre Naturel)

  • 중농주의자들은 경제 현상이 인간의 인위적인 개입 없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들은 경제적 질서를 자연적 질서로 간주하였고, 따라서 경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존중하고 방해하지 않는 것이 경제적 번영과 균형을 이루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 이는 국가의 최소한 개입, 즉 자유방임(Laissez-faire) 원칙의 초기 형태로 이어졌다.

농업 중심 경제관

  • 중농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제는 농업만이 실질적인 경제적 잉여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농업은 자연을 활용하여 인간이 소비하는 것 이상의 부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제 활동이며, 제조업과 상업은 단지 이러한 농업적 잉여를 재분배하거나 변형시키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 이러한 관점에서 농업의 활성화가 국가 경제 성장의 필수 조건이었다.

순생산물(Net Product)의 개념

  • 프랑수아 케네는 『경제표(Tableau économique)』(1758)에서 경제 활동에서 창출되는 순생산물 개념을 제시하였다.
  • 순생산물은 농업 부문에서 창출되는 잉여 생산을 뜻하며, 이 잉여가 사회 전체의 경제 순환을 촉진시키는 원동력으로 보았다.
  • 순생산물은 지주계층에서부터 생산자와 상공업자에게까지 경제적 흐름을 촉진시키며 사회적 부를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중농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와 이론

1. 프랑수아 케네(François Quesnay, 1694-1774)

  • 중농주의의 창시자이자 가장 중요한 이론가이다. 그는 루이 15세의 주치의이기도 했으며, 경제 현상을 인체의 혈액순환에 비유하여 분석했다.
  • 『경제표(Tableau économique)』 (1758): 최초로 경제순환 과정을 도표로 표현하여 경제 현상의 상호의존성을 명확히 설명하였다.
  • 케네는 경제적 번영을 위해 농업 생산을 촉진하고 토지 소유자의 합리적 소비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 1727-1781)

  • 튀르고는 중농주의 이론을 현실의 경제정책으로 구현하려고 시도한 행정가이자 경제학자였다.
  • 루이 16세의 재정총감으로서 곡물 자유무역 도입, 세금 간소화 및 공정한 세제 개혁, 그리고 특권적 지대 제거를 시도하였다.
  • 그는 경제적 자유가 혁신과 생산성을 촉진한다고 믿었으며, 국가의 경제적 간섭 최소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3. 빅토르 드 미라보(Victor de Mirabeau, 1715-1789)

  • 중농주의의 주요한 옹호자 중 한 사람으로, 특히 『인간의 벗』(L’Ami des hommes)을 통해 농업의 중요성과 경제적 자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중농주의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중농주의의 의의는 크게 다음과 같다.

  • 최초로 경제 현상을 독립된 분석 대상으로 설정하고, 경제적 질서가 자연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사고를 확립하였다.

  • 국가 개입 최소화와 자유무역의 개념을 강조하여 이후 아담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과 자유주의 경제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중농주의에는 명확한 한계점도 존재했다.

  • 농업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제조업과 상업의 생산적 역할을 경시하여, 산업혁명의 도래와 함께 현실성을 잃었다.

  • 지나친 자유방임주의는 당시의 사회적 불균형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비교

항목 중상주의 중농주의
경제의 근원 귀금속(금, 은)의 축적 농업 생산 및 자연적 경제 순환
국가의 역할 적극적 개입과 보호주의 최소한의 개입(자유방임)
무역에 대한 태도 보호무역, 무역수지 흑자 중시 자유무역과 자연적 균형 강조
대표적 국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주로 프랑스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는 근대 경제학 발전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중농주의는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스미스는 중상주의의 보호주의를 비판하면서, 경제의 진정한 원천은 국가의 개입이 아닌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노동의 생산성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상주의는 현대 국가주의적 경제정책, 보호주의 무역정책 등의 역사적 원형으로 작용했으며, 중농주의는 시장 자율성과 경제 자유주의의 이론적 선구자로 평가된다.